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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10.02.16 변하지 않는 것들에 관하여 4
변하지 않는 것들에 관하여
동구, 동리 혹은 마을
그보다 더 적절하게 태어난 곳을 설명할 단어는 없는 것 같다.
집에서 5분 거리엔 우물이 있었다.
그 우물을 기점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의 군상이 그 곳까지 선이라도 그은 듯,
우물을 지나고부터는 내리 오르막이다.
실개천이 흐르고,
논이 펼쳐져 있으며,
먼 발치엔 온통 산과 산과, 과수원이 있었다.
그 논의 한쪽 가엔
창수가 살던 집이라고 했던가,
낡다 못해 다 스러져가는 길게 늘어선 폐공장의 앞 뜰에는
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.
우리 가족이 이 곳, 동리로 이사오기 훨씬 전부터
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.

길이 크게 나,
차들이 다니는 길까지의 오르막을 오르면,
버스를 기다리는 그 곳에서는 동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.

커어다란 나무 한 그루도 한 켠에 자리잡아서
그 모습은 어떤 이의 눈에는 자못 고즈넉해보이기도 한 그런 것이었다.

비만 오면 진창길로 변하는 흙길이
언젠가 콘크리트 길로 바뀌었다.
그렇게 콘크리트 길 위로
사람들과 차들이 오고가면서
흙들이 쌓였고,
여전히 먼지가 날리던 콘크리트 길은
언젠가 아스팔트 길로 바뀌었다.

그렇게 아스팔트 길이 나던 즈음에는
멀리 보이던 과수원에서 더 이상 두툼스런 종이 봉지들도 사라져버렸고
국민학교 3학년 때,
자연 시간에 준비물로 가져가려고 올챙이를 잡았던
그 실개천에도 더 이상 눈에 뵈는 것들이 없어져가고 있었다.

열 아홉 살,
대학 수학 능력 시험을 치르고 난
무얼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던 나는
그 해 겨울,
여느 때 처럼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오다가도
문득 문득 그 커다란 나무 곁에서
오리온 자리며, 쌍둥이 자리,
그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큰 개자리의 시리우스를 보곤 했었다.
어느 날인가에는
친구의 쌍안경을 빌려
벌판 위에 서서
천정 꼭대기에 박혀있던 목성을 보던 날도 있었다.

서른이 되고,
마흔이 되어도,
나고 자란 이 곳에서
이 동리에서 이 집에서
할아버지가 손수 지으셨다는 이 집에서 살게 될 줄로만 알았다.

그러나
사람의 생도 변하고,
집도 변하고,
동리도 변하여
이제는 커다란 나무마저도 사라져
이 조그만 동리에 육 층짜리 국민학교가
아니,
초등 학교가 들어섰다.
논도 밭도 과수원도 산도
사라진 지 오래.
티비 속에 나오는 어여쁜 아낙들이 손짓하는
아파트가 들어서고
몇 달만에 한 번씩 동리를 찾는 나는
이 묘한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몰라
이래 아우성이다.

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.
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변했고
나도 변했고
영원할 줄로만 알았던,
이제는 친구라 부르지 않는 그도 변했다.

저기 저 머리 위에서 빛나는
별들도 변한다는데
이 작은 행성의 초라한 귀퉁이,
그 곳에 사는 나는 왜
변치 않을 거라고 믿었던 것일까.

빛의 속도는 유한하다던데,
그것마저도 변하는 것은 아닐까..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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